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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이수현씨 기념 방일연수

제16회 이수현씨기념방일연수 후기 (9-下) - 자유행동일(나라답사) (2/19)

by Elenmar 2018. 2. 11.
제16회 이수현씨기념방일연수 후기 (9-下) - 자유행동일(나라답사) (2/19)


#가스가탸이샤

3월당을 나와 나라공원 뒷산을 둘러가는 길을 택해서 걸어가니, 방금의 어두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사람 적은 상점들이 오른쪽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가 상당히 산 위에 위치해 있다 보니 산 위를 가로질러 가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산 위 길이라고 해도 험한 부분은 없고 전부가 포장된 길로, 지치지 않았다면 산책삼아 걸을 만한 길이었다.
가스가타이샤는 처음에 나라에 천도할때, 가장 강성했던 가문인 후지와라씨의 씨 신사로 만들어진 신사이다. 비록 그 성씨는 힘을 잃었지만, 신사는 여전히 남아 많은 사람들의 참배를 받고 있었다. 1300여년의 시간을 이어온 이 신사와 같이 권력은 나고 져도 문화는 계속 이어져 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석등들

가스가타이샤 입구에 들어서니 석등이 늘어서 있었다. 교토의 후시미이나리타이샤에는 사람들이 기진한 도리이가 온 산에 둘러져 있다면, 가스가타이샤에는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석등을 바쳐 온 것이다. 바닥에 이끼가 껴 있고, 높이 자란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 띄엄띄엄 햇빛이 비칠 뿐인 그 배경은 마치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신사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금적색으로 칠해진 신사 건물과 그날따라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했던 경내에서는 경건함과 '일본스러움'이 한껏 흘러나왔다. 나중에 센터에 돌아와서 오노데라 선생님과 같이 밥을 먹으며 말하던 도중에 이 신사 이야기를 꺼냈었는데, 오노데라 선생님도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신사가 이 신사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그런가...'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생각해 볼 수록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풍경을 즐기며 나는 산을 내려와 다시 나라 공원 중앙으로 왔다. 다리도 슬슬 아파왔고, 때마침 점심 때였기에 흥복사로 향하기 전에 공복부터 먼저 채우려고 주변 식당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역시 관광지여서 그런가 혼자 선뜻 들어가서 시키기에는 가격 면에서나 분위기 면에서나 조금 꺼려지는 면이 있었다. 결국, 일본 편의점 도시락을 매우 좋아하는 나는 나라 현청에서 발견한 세븐일레븐에서 도시락을 사서 현청 앞에 높여있던 의자에 앉아서 먹었다. 옆에서 보면 꽤 안쓰러운 모습이었을 것 같다. 게다가 2월이라 날씨도 풀리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혼자 다니면서 그런 식사도 언제 해보겠냐는 생각으로 먹었던 것 같다.

#흥복사
흥복사(興福寺)는 나라 시대에 가장 강성했던 가문인 후지와라씨가 나라 천도 당시에 씨사(氏寺)로 건립한 절이라고 한다. 이 전 순서로 갔다 온 후지와라씨의 씨 신사인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와는 쌍을 이루는 절인 것이다. 그만큼 컸던 절로, 지금의 나라 공원을 다 덮고 있었다고 하는데, 메이지 시대의 폐불훼석 당시 크게 피해를 입고 지금의 흥복사 오중탑과 동금당, 남원당 등을 제외한 건물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는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중금당 복원공사를 하고 있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흥복사는 내가 나라를 다시 가야 할 이유를 제공해 준 절이기도 하다. 동금당의 약사여래상과 그에 딸린 불상들을 제외하면 흥복사의 모든 불상과 문화재는 국보관에 있고, 이 중 대부분이 국보 아니면 중요문화재이다. 하지만, 내가 간 2017년 2월에 이 국보관은 임시휴관하고 있었다. 국보관에 대대적인 보수 등이 이루어지는 2017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년 내내 휴관이라고 했다. 결국 그까지 힘들여 가놓고 정작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를 가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재방문의 이유가 생긴 셈이었던 것이다.


흥복사 동금당. 오른쪽은 높이 50m의 오중탑

국보관이 닫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눈물을 머금고 동금당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본존 약사여래상과 함께 모두 국보인 문부소살, 유마거사상, 사천왕상, 십이지신상이 모셔져 있다. 또, 불행 중 다행으로 유홍준 교수가 국보관에서 꼭 봐야 할 문화재로 이야기 한 청동불두가 국보관 임시 휴관동안 잠시 이곳에 모셔져 있었다. 비록 한 구석에 있어서 제 자리에 모셔져 있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청동불두가 풍기고 있던 묘한 아우라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 날 나라 답사를 돌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는 불교에 대한 지식을 상당히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하루 내내 절과 그 안에 모셔진 불상만 보고 다녔는데 그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 답사를 통해서 여래와 보살, 사천왕 등의 역할을 알 수 있었고, 불교의 시간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다. 비록 내가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어서 그에 대한 배경지식도 없는 편이었지만, 이런 활동을 하면서 내가 몰랐던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서양문화 뿐만이 아닌 동양미술과, 그를 뒷받침하는 문화적 요소들에 대해서도 한 발짝 더 들여놓은 셈이 되었다.

#약사사
50m의 높이와 그에 걸맞는 무게감을 자랑하는 흥복사 오중탑을 뒤로하고 나니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원래 약사사(薬師寺)와 당초제사(唐招提寺)라는 두 절도 내 답사 리스트에는 올라와 있었다. 다만, 이들이 나라공원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해 있기에 시간을 보고 결정하자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이제 오면 다시 또 언제 오겠냐는 생각에 여세를 몰아 두 절으로 향했다. 긴테쓰나라역에서 난바행 열차를 탔다가 중간의 야마토사이다이지(大和西大寺)역에서 긴테쓰가시하라선(近鉄橿原線)을 타고 남쪽으로 가면 니시노쿄(西ノ京)역이 나온다. 이 역을 나가면 바로 약사사가 나온다. 플랫폼 안에 약사사임을 알리는 비가 들어와 있을 정도이다.
참고로 야마토사이다이지역에서 니시노쿄역으로 내려오는 방향 기준으로 도중의 오른쪽에 호수 중간에 섬 같은 게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에서 봐서는 전혀 모양을 알 수 없지만, 사실 누군가의 무덤이다.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라고 하여, 앞쪽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각지게, 뒤쪽은 원형으로 둥글게 만들어져 있어 위에서 보면 열쇠구멍처럼 생긴 무덤양식인데, 일본에서 4,5세기에 많이 만들어진 무덤 양식이다. 위성지도로 나라 지역을 보면 해자의 유무 차이 뿐이지, 이런 모습의 무덤이 있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규모로 볼 때 사회 최상층 사람들의 무덤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덴노와 황후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곳도 꽤 된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에도 그보다 일찍 만들어진 전방후원분이 발견된다고 한다. 한국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일본에 남겨놓은 큰 흔적 중 하나일 수 있는 셈인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약사사로 향했다. 약사사는 헤이죠(나라) 천도 이전, 덴무천황에 의해 발원된 곳이다. 이후 현재의 나라 시내로 정치의 중심이 옮겨가면서 힘을 잃긴 했지만, 절은 계속 이어져왔다. 하지만, 16세기의 화재로 동탑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2003년에 들어서 복원공사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부분 새 건물이지만 유일하게 1300년 넘게 제 모습을 지켜오고 있는 약사사 동탑(東塔)을 보는 것이 약사사 답사의 중요한 코스이기도 하다. 동탑은 3층탑이지만, 총 6겹이 지붕이 얹어져 있는 형상이다. 그 지붕들의 폭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면서 리드미컬한 형상을 연출하고 있기에 '얼어붙은 음악'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 탑이다.
이 곳은 나라 관광 중에서도 잘 찾아지지 않는 곳인지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한산했다. 나는 매표소로 가서 고등학생 표를 끊었다. 같은 역에서 내려 내 조금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한 노부부가 '어머 고등학생이 여길 혼자서...'라고 말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내 나이대의 학생이 이런 절을 혼자 찾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서 그런 말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사사에 들어서자, 내 기대를 무너뜨리는 광경이 눈에 보였다. 동탑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대한 가림막이 세워져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2020년 종료를 목표로 해체수리공사를 하고 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펜스를 둘러서 해체수리공사의 진척 상황을 안내하는 사진과 설명들이 붙여져 있었다. 여기서도 매우 큰 허탈감과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느꼈다. 나중에 읽어보니 '답사기'에도 이미 2013년부터 이 동탑이 해체수리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아무리 원래 꼭 가야 겠다는 생각이 없었다지만, 이 탑을 보려 왔는데, 탑을 볼 수 있는지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고 왔다니. 물론 그 반대편에 복원된 서탑이 비슷한 형상을 가지고 서 있기는 했지만, 그 느낌을 제대로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름다운 동탑의 모습...은 가려진 채로

아쉽지만 아쉬운 대로 나는 금당으로 향했다. 금당에는 약사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이 곳을 창건한 덴무천황이 병에 걸렸던 황후의 건강을 기원하며 모신 약사상이라고 한다. 이 약사삼존상은 7세기 중반 다이카 개신 이후 일본이 한반도보다는 당나라의 문화를 더 많이 받아들일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보니 왠지 불상이 '중국스러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 그 앞에서 두 일본인 관광객이 현지 가이드처럼 보이는 분한테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옆에서 듣고 있자니 부처님 손에 물갈퀴가 달린 것이 현생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효과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그런 식으로 귀동냥으로 지식의 조각들만 주워들었지만, 다음에는 제대로 공부하고 와서 봐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금당 뒤에는 대강당이 있었다. 대강당에는 미륵삼존상이 모셔져 있었다.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재밌는 것을 하나 들은 것이 미륵을 일본어로 '미로쿠' 라고 발음하는데, 이것이 일본어로 3(미)와 6(로쿠)라서 3 곱하기 6인 18이 미륵보살이 펼치는 세상을 뜻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분명히 미륵의 이름이 숫자 18로 이어지는 것은 일본밖에 없을 것인데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륵삼존상을 보고 대강당의 뒤쪽 부분으로 돌아가니 한 돌이 놓여져 있었다. 이게 무슨 돌인가 싶어서 보고 있자니 아까 설명을 들은 가이드와 일본인 관광객 둘이 앞에서의 순서를 마치고 내 쪽으로 왔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그 돌이 부처님의 발자국이 새겨진 돌이라고 했다. 그게 뭔 소린가 싶어서 듣고 있자니 원래 인도에서 불교가 발원할 때는 불상이란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해서 한동안 우상파괴와 같은 행위가 이어졌던 것처럼, 부처님의 모습을 현실에 다시 드러내는 것은 불경한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의심많은 사람에게 부처가 실존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온 아이디어 중 하나가 이 불족석(佛足石)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발을 돌에 그려서 그게 부처님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방식인데, 그런 방식이 일본에 까지 전해져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국보라고. 무심코 지나쳐갔을 돌덩이가 국보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역시 무엇이든지 알고 나면 다르게 보인다.

#당초제사
약사사를 나와서는 북쪽으로 조금 걸어갔다. 주변은 전형적인 일본 시골 마을이었다. 걸어가면 당초제사(唐招提寺)가 나온다. 처음에는 당초제사의 이름을 보고 당나라(唐)에서 초대(招)받아 온 스님이 세운 절인지 알았더니, 알고보니 승려가 모이는(招提) 큰(唐)절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어쨌든 다섯 번의 난파를 겪어가며 당나라에서 온 감진스님이 세운 절이라고 하니 영 틀린 해석은 아니었던 셈이다.
덴무천황이 친필로 써서 내려주었다는 액호가 걸린 당초제사 입구로 들어가자 매우 널찍해 보이는 금당이 시야를 묵직하게 채우며 눈 앞에 들어왔다. 건물 자체에서 무게감과 엄숙함이 느껴졌다. 금당 안에는 노사나불좌상을 중심으로, 보수 당시 실제로 천개에 이르는 손을 다 떼었다 다시 붙였다는 십일면천수관세음보살상, 약사여래상이 안에 계셨다. 안쪽이 어두웠고, 철망이 처져 있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일단 관세음보살상의 스케일에 압도당했던 것 같다.
뒤쪽으로 돌아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으며, 그 또한 국보라는 종루를 지나치자 헤이죠궁에서 통째로 옮겨와, 유일하게 헤이죠 궁의 건물 중에서 살아남게 되었다는 강당이 나왔다. 이외에도 어영당과 같이 국보이지만 비공개여서 들어가지는 못하는 건물들이 보였다.  강당 뒤로 가면 감진스님의 묘가 있고, 당초제사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 신보장이 있어 그쪽으로 향했다. 감진스님의 묘는 이끼에 둘러싸인 조용한 곳에 있어 마치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노승의 무덤이란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이후 나는 묘를 나와 신보장으로 가려 했으나, 여기도 동계(12월-2월)에는 휴관한다는 안내가 걸려 있었다. 이게 도대체 몇번째인지. 앞으로는 올 때 철저히 조사하고 와야 겠다는 교훈을 받은 답사이기도 했다. 어쩌랴, 앞뒤 없이 호기심만 가지고 뛰어든 결과인 것을.


문닫힌 신보장

#난바로
이후 니시노쿄 역으로 돌아와 다시 긴테쓰선을 타고 야마토사이다이지 역으로 올라갔다. 야마토사이다이지역은 긴테쓰의 교토선(교토-나라), 나라선(오사카-나라), 가시하라선(나라시-가시하라시)이 교차하는 역으로 나라에서 어딜 가든 웬만하면 거쳐가게 될 역이다. 나는 이 날 시간이 안 되어 가 보지는 못했지만 참고로 아스카(飛鳥)가 있었던 현재의 아스카촌(明日香村)도 가시하라 선을 타고 계속 내려가면 갈 수 있다.
아직 오후 5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절과 신사, 박물관들은 모두 문이 닫을 시간이 되어 더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나라에서 밥을 먹자니 시간이 좀 남았고,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오사카 시내로 간다며 헤어진 건이에게 연락하자 난바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 기회에 오사카 왔다면 꼭 한번은 가본다는 에비스 다리 앞 글리코 간판에서 사진이나 찍자는 생각으로 흔쾌히 수락하고 난바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 사진 하나는 건졌다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며 난바에 도착해 역에서 건이를 만났다. 그리고 에비스 다리 쪽으로 이동해 사진을 찍은 뒤 저녁을 먹을 곳을 찾으러 나섰다. '여행지에서 딱히 먹을 게 없어 보이면 프랜차이즈를 선택하라, 그러면 평타라도 친다'라는 말에 따라 '마쓰야(松屋)'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건이가 추천하는 규동을 먹어봤다. 평소에 고기는 먹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맛있었다. 전날 저녁부터 시작해서 세 끼를 내리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고 난 뒤에 먹는 식사여서 그런지 더 잘 먹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날 센터에 돌아와서 내가 걸은 걸음수를 체크해 보니 4만보가 넘었다. 평소에 학교에서 지내면 하루 내내 1만보를 채우기가 힘든데 저녁까지 해서 4만보를 걸었다니, 정말 강행군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부터는 최종발표회 준비가 있었기에 더 무언가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조원들과 다음 날 있을 원고 수정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다들 힘들었던 지라 그것도 다음 날로 미루고 이 날은 쓰러져 잠들었던 것 같다.


이날 걸은 4만보의 기록

참고자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2 아스카 나라 (유홍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