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이수현씨기념방일연수 후기 (7) - 도쿄연수여행 1,2일차(2/16-2/17)
#2월 16일
##신칸센
다행히 이 날은 늦지 않게 일어나서 집합할 수 있었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신오사카역으로 향했다. 센터에서도 1시간이 걸리는 이 곳으로 향한 이유는 한 가지. 신칸센.
내가 도쿄여행에서 기대하는 것은 물론 이수현씨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도 있었지만, 먼저 도쿄를 왕복하는 이동수단도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고 꼽을 수 있겠다. 도쿄로 갈 때는 신칸센을 타고 가게 되어 있었고, 올 때는 전일본공수의 비행기를 타고 하네다공항에서 간사이공항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 타고 갈 신칸센은 일본 경제의 상징인 신칸센 중에서도 가장 먼저 개통된 노선이고, 이용객이 가장 많으며, 중요도도 가장 높은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급인 노조미였다. 참고로, 도카이도 신칸센은 정차하는 역의 수에 따라서 노조미/히카리/코다마로 나뉜다. 노조미는 이 중에서 2시간 30분만에 신오사카-도쿄를 주파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등급이다. 그런 점에서 도쿄까지의 이동 자체도 평소 철도라는 교통수단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기대되는 점 중 하나였다.
##신칸센
다행히 이 날은 늦지 않게 일어나서 집합할 수 있었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신오사카역으로 향했다. 센터에서도 1시간이 걸리는 이 곳으로 향한 이유는 한 가지. 신칸센.
내가 도쿄여행에서 기대하는 것은 물론 이수현씨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도 있었지만, 먼저 도쿄를 왕복하는 이동수단도 큰 관심사 중 하나였다고 꼽을 수 있겠다. 도쿄로 갈 때는 신칸센을 타고 가게 되어 있었고, 올 때는 전일본공수의 비행기를 타고 하네다공항에서 간사이공항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 타고 갈 신칸센은 일본 경제의 상징인 신칸센 중에서도 가장 먼저 개통된 노선이고, 이용객이 가장 많으며, 중요도도 가장 높은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급인 노조미였다. 참고로, 도카이도 신칸센은 정차하는 역의 수에 따라서 노조미/히카리/코다마로 나뉜다. 노조미는 이 중에서 2시간 30분만에 신오사카-도쿄를 주파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등급이다. 그런 점에서 도쿄까지의 이동 자체도 평소 철도라는 교통수단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기대되는 점 중 하나였다.
노조미 '만'의 배차간격. 우측에 히카리와 고다마의 시간도 보인다.
출발 이전에 있어 요시모토 선생님과 오노데라 선생님이 주의를 준 점을 다시 이야기하자면, 지하철 수준으로 발착하는 신칸센 배차간격 때문에 최대한 신속히, 그리고 모두가 한번에 신칸센에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사카-도쿄 편도 한 장에 한국 돈으로 14만원 가까이 하는 표도 한번 놓치면 다시 못 쓰기 때문에 사비로 표를 끊어서 와야 한다는 것. 덕분에 우리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였고, 역에서는 꽤 전부터 플랫폼에 서서 기다린 덕에 제때 모두가 탈 수 있었다.
우리가 모두 타고 나서는 바로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정차하는 역도 도쿄까지 채 5역밖에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빠른 속도로 교토를 거쳐 나고야를 통과했다. 도카이도 신칸센에서 꼭 누려봐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후지산을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사카에서 도쿄로 향할 때는 왼쪽 창가석, 거꾸로는 오른쪽 창가석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다행히 왼쪽 창가석에 앉을 수 있었고, 제때 후지산을 볼 수 있었다. 후지산을 보고 신기해 하는 건 외국인이나 일본인이나 마찬가지라서, 이 때는 차 곳곳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터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후지산 속, 신칸센이 보여
##아사쿠사 & 천초사
이후 우리는 그 자체로도 문화재인 도쿄역에 도착해서 차를 타고 아사쿠사로 향했다. 아사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천초사(浅草寺)로, 이 지역도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카미나리몬을 들어가서 양 옆으로 들어서 있는 상점들을 포함해 주변에 큰 관광 상가가 발달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자유행동. 점심도 이곳에서 알아서 해결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주어진 태스크는 아사쿠사에서 유명한 기념상품 혹은 음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오는 것이었다. 또,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가 더 있었으니,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과 사진을 찍는 것. 일본인들이 이런 전통적인 건물에 올 때는 기모노를 꽤 입는 편이고, 이 주변에서 사진을 찍어달라는 외국인이 많아서인지 너그럽게 같이 찍어준다는 듯 했다. 덕분에 우리는 천초사를 왔다 갔다 하며 각자 다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또, 이 주변에서 유명하다는 메론빵도 하나씩 사먹고, 점심도 나름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유명한 음식이 사람 형상이 빵에 그려진 닝교야키(人形焼き)였는데, 그것은 먹어보지 못했다.
우리는 천초사에 가서 오미쿠지도 각자 하나씩 뽑았다. 이 오미쿠지와 관련된 내 개인적인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중3때 졸업여행으로 친구와 둘이서 이 곳에 왔을 때, 친구가 100엔을 넣고 뽑아야할 오미쿠지에 10엔만 넣고 뽑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뽑은 오미쿠지에 적힌 글자가 흉(凶)이어서 벌 받았다고 내가 놀린 적이 있었다. 양심적인 사람인 나는 물론, 100엔을 넣고 무난하게 길(吉)을 뽑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걸, 100엔을 넣고 뽑았는데 흉(凶)이 나와버렸다. 천초사가 다른 곳에 비해 운세가 박하다는 말도 미리 들은 적 있지만, 막상 내가 당사자가 되니 어딘가 뒤가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 오미쿠지를 기념품으로 들고 나오는 불찰을 저지르지 않고 천초사에 잘 묶고 나와서 액땜이 되었는지, 이후에 크게 나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운세는 좋게 나와야 기분이 좋은 법이다.
이후 우리는 그 자체로도 문화재인 도쿄역에 도착해서 차를 타고 아사쿠사로 향했다. 아사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천초사(浅草寺)로, 이 지역도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카미나리몬을 들어가서 양 옆으로 들어서 있는 상점들을 포함해 주변에 큰 관광 상가가 발달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자유행동. 점심도 이곳에서 알아서 해결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서 주어진 태스크는 아사쿠사에서 유명한 기념상품 혹은 음식이 무엇인지를 알아오는 것이었다. 또,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가 더 있었으니,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과 사진을 찍는 것. 일본인들이 이런 전통적인 건물에 올 때는 기모노를 꽤 입는 편이고, 이 주변에서 사진을 찍어달라는 외국인이 많아서인지 너그럽게 같이 찍어준다는 듯 했다. 덕분에 우리는 천초사를 왔다 갔다 하며 각자 다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또, 이 주변에서 유명하다는 메론빵도 하나씩 사먹고, 점심도 나름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유명한 음식이 사람 형상이 빵에 그려진 닝교야키(人形焼き)였는데, 그것은 먹어보지 못했다.
우리는 천초사에 가서 오미쿠지도 각자 하나씩 뽑았다. 이 오미쿠지와 관련된 내 개인적인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중3때 졸업여행으로 친구와 둘이서 이 곳에 왔을 때, 친구가 100엔을 넣고 뽑아야할 오미쿠지에 10엔만 넣고 뽑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뽑은 오미쿠지에 적힌 글자가 흉(凶)이어서 벌 받았다고 내가 놀린 적이 있었다. 양심적인 사람인 나는 물론, 100엔을 넣고 무난하게 길(吉)을 뽑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걸, 100엔을 넣고 뽑았는데 흉(凶)이 나와버렸다. 천초사가 다른 곳에 비해 운세가 박하다는 말도 미리 들은 적 있지만, 막상 내가 당사자가 되니 어딘가 뒤가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 오미쿠지를 기념품으로 들고 나오는 불찰을 저지르지 않고 천초사에 잘 묶고 나와서 액땜이 되었는지, 이후에 크게 나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운세는 좋게 나와야 기분이 좋은 법이다.
여기서 뽑은 흉
아사쿠사에서 산 것은 메론빵과 점심 뿐만이 아니었다. 도쿄에서 '일본스러운' 기념품을 사기 위해선 여기가 가장 좋다는 생각에 마네키네코 한마리와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인이 그려진 티셔츠를 하나 구입했다. 마네키네코는 지금까지도 우리 집 찻장 속에서 웃으면서 한 손을 들고 복을 불러들이고 있지만, 티셔츠는 지금 입고 다니고 있지 않다. 이유는 티셔츠에 그려진 사람이 입고 있는 기모노에 그려진 무늬가 욱일승천기의 그것이었다는 것. 살 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사고 나서 한국에서 입고 다니다 보니 친구들의 '어! 그거....' 하는 반응에 다시 자세히 보니 욱일승천기와 닮은 무늬였던 것이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갖고 살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구매의도가 뭐였든지 간에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욱일기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고 다니다 보니 졸지에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정말 반성하는 일이다. 일본과 앞으로 관계를 발전시켜야 함과 동시에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피부로 와닿게 깨달은 사건이었다. 일본에 가셔서 기념품을 사거나 어떤 행동을 하던, 이와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에피소드 또한 부끄럽지만 여기에 적는다.
##일본 국제교류기금 본부 방문
다음 순서는 신주쿠에 위치한 일본 국제교류기금 본부 방문 순서였다. 우리의 연수를 후원하고, 주관하는 곳이 국제교류기금이니 만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순서기도 했다. 내가 이 후기 내내 지칭한 '서울센터'도, '간사이 센터'도 국제교류기금의 지사인 셈이기 때문이다. 들어가기 전, 우리는 바로 옆 건물인 도쿄 한국문화원 건물로 안내되...는가 했더니 그저 밖에서만 보고 바로 국제교류기금으로 향했다. "그냥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요."라는 오노데라 선생님의 말과 함께. 국제교류기금에서는 여타 다른 시설 방문과 같이 기금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듣는 정도였다. 이곳에서도 간사이 센터에서 근무하다 서울센터로 온 카츠타 부장님처럼, 서울센터에서 근무하다 다시 본부로 온 분이 계셔서 한국어로도 설명을 간단히 듣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외에는 꽤 큰 도서관이 딸려있었단 것 이외에는 크게 기억나는 점은 없다.
다음 순서는 신주쿠에 위치한 일본 국제교류기금 본부 방문 순서였다. 우리의 연수를 후원하고, 주관하는 곳이 국제교류기금이니 만큼,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순서기도 했다. 내가 이 후기 내내 지칭한 '서울센터'도, '간사이 센터'도 국제교류기금의 지사인 셈이기 때문이다. 들어가기 전, 우리는 바로 옆 건물인 도쿄 한국문화원 건물로 안내되...는가 했더니 그저 밖에서만 보고 바로 국제교류기금으로 향했다. "그냥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요."라는 오노데라 선생님의 말과 함께. 국제교류기금에서는 여타 다른 시설 방문과 같이 기금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듣는 정도였다. 이곳에서도 간사이 센터에서 근무하다 서울센터로 온 카츠타 부장님처럼, 서울센터에서 근무하다 다시 본부로 온 분이 계셔서 한국어로도 설명을 간단히 듣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외에는 꽤 큰 도서관이 딸려있었단 것 이외에는 크게 기억나는 점은 없다.
##도쿄도청 전망대
이후 우리는 도쿄도청으로 향했다. 다른 지자체 같았으면 관공서에 갈 일은 크게 없겠지만, 도쿄도청은 버블 경제 지어진 고층 쌍둥이 타워를 중심으로 한 건물로, 그 높이와 규모에 있어서 그 자체로도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이다. 더불어 일본에는 지진 때문인지 마천루 자체가 크게 없는 편이라 각 쌍둥이 타워의 꼭대기 층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도쿄 전체가 보인다. 게다가 관공서다 보니 입장료도 없어, 우리가 가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테러 경계 때문인지 일종의 가방검색을 마치고 나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올라가니 도쿄의 야경이 내려다보였고, 중앙에는 기념품 판매점과 레스토랑 등이 있었다. 야경은, 서울도 그렇지만, 도쿄 또한 천만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지라, 사방이 모두 불빛이었다. 우리가 여태껏 간 오사카나 교토 또한 큰 도시였지만, 높은 장소에서 내려다 볼 기회는 없었기에, 연수 중에서 만나게 된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후 우리는 도쿄도청으로 향했다. 다른 지자체 같았으면 관공서에 갈 일은 크게 없겠지만, 도쿄도청은 버블 경제 지어진 고층 쌍둥이 타워를 중심으로 한 건물로, 그 높이와 규모에 있어서 그 자체로도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이다. 더불어 일본에는 지진 때문인지 마천루 자체가 크게 없는 편이라 각 쌍둥이 타워의 꼭대기 층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도쿄 전체가 보인다. 게다가 관공서다 보니 입장료도 없어, 우리가 가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테러 경계 때문인지 일종의 가방검색을 마치고 나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올라가니 도쿄의 야경이 내려다보였고, 중앙에는 기념품 판매점과 레스토랑 등이 있었다. 야경은, 서울도 그렇지만, 도쿄 또한 천만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지라, 사방이 모두 불빛이었다. 우리가 여태껏 간 오사카나 교토 또한 큰 도시였지만, 높은 장소에서 내려다 볼 기회는 없었기에, 연수 중에서 만나게 된 신선한 경험이었다.
도쿄도청 전망대에서 (촬영: 간사이 센터)
##저녁 & 체크인
이후에 우리는 도청을 내려와서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 음식점 자체도 꽤 분위기 있어보였고, 음식도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참고로 우리가 도착한 첫 날, 언제 먹는 것인지도 모른 채 앙케이트에서 고른 메뉴가 바로 이 식당에서 나왔다. 열흘 전부터 메뉴까지 다 예약해 놓고 있었다니, 그런 점에선 약간 놀란 기억이 있다. 이 곳에서 기억할 만한 이야기라면 건이가 특정 메뉴에만 딸려 나오는 아이스크림 후식을 보고 '어 나도 저거 먹고 싶어'를 일본어로 몇번 했다가, 그걸 '나는 왜 후식이 안 나오냐'라고 받아들인 요시모토 선생님이 굳이 후식을 하나 더 얻어줬던 일이 있다. 당연히 건이는 괜찮다고 추후 수습을 하려 했지만 이미 받아온 음식이었으니, 결국 먹게 되었다. 한국에서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인들은 돌려 말하는 게 특징이라고 하니, 선생님들이 건이가 자신도 후식을 강하게 (몇번 반복했으니)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같은 말이라도 문화에 따라,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후 우리는 호텔로 향해, 체크인하고 방에 들어갔다. 이 날은 9시가 넘어서 늦게 체크인 한지라, 피곤해서 크게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잤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 우리는 도청을 내려와서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 음식점 자체도 꽤 분위기 있어보였고, 음식도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참고로 우리가 도착한 첫 날, 언제 먹는 것인지도 모른 채 앙케이트에서 고른 메뉴가 바로 이 식당에서 나왔다. 열흘 전부터 메뉴까지 다 예약해 놓고 있었다니, 그런 점에선 약간 놀란 기억이 있다. 이 곳에서 기억할 만한 이야기라면 건이가 특정 메뉴에만 딸려 나오는 아이스크림 후식을 보고 '어 나도 저거 먹고 싶어'를 일본어로 몇번 했다가, 그걸 '나는 왜 후식이 안 나오냐'라고 받아들인 요시모토 선생님이 굳이 후식을 하나 더 얻어줬던 일이 있다. 당연히 건이는 괜찮다고 추후 수습을 하려 했지만 이미 받아온 음식이었으니, 결국 먹게 되었다. 한국에서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인들은 돌려 말하는 게 특징이라고 하니, 선생님들이 건이가 자신도 후식을 강하게 (몇번 반복했으니)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같은 말이라도 문화에 따라,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후 우리는 호텔로 향해, 체크인하고 방에 들어갔다. 이 날은 9시가 넘어서 늦게 체크인 한지라, 피곤해서 크게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잤던 것으로 기억한다.
#2월 17일
이 날은 우리 연수의 가장 큰 목적이기도 한, 이수현씨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과정이었다. 하루 내내 이수현씨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관람, 신오쿠보 역에서의 헌화 및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 방문 등의 일정이 우리를 기다렸다. 이수현씨의 기일은 1월 26일이다. 우리 이전 기수 중 일부는 이 날짜에 맞춰서 도쿄에 와, 이수현씨의 부모님이 참석하는 기념행사 등에도 참석하여 이를 취재한 방송과 신문 등 일본 매체에도 등장한 경우가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우리는 방일 일정 자체가 2월중이었던 까닭에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또 하나 위의 사실에 비해서는 작은 일이지만, 이 날이 내 생일이었던 까닭에 나는 나의 18번째 생일을 일본 도쿄에서 맞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이 날 있었던 일정이 일정이었던 만큼 다른 이벤트는 없었지만, 하루 내내 남자애들이 '생일빵'을 언급했기에 이 폭력적(?)인 한국문화에 오노데라 선생님이 문화충격을 받은 것은 하나 기억해 둘 점이겠다.
이 날은 우리 연수의 가장 큰 목적이기도 한, 이수현씨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과정이었다. 하루 내내 이수현씨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관람, 신오쿠보 역에서의 헌화 및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 방문 등의 일정이 우리를 기다렸다. 이수현씨의 기일은 1월 26일이다. 우리 이전 기수 중 일부는 이 날짜에 맞춰서 도쿄에 와, 이수현씨의 부모님이 참석하는 기념행사 등에도 참석하여 이를 취재한 방송과 신문 등 일본 매체에도 등장한 경우가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우리는 방일 일정 자체가 2월중이었던 까닭에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또 하나 위의 사실에 비해서는 작은 일이지만, 이 날이 내 생일이었던 까닭에 나는 나의 18번째 생일을 일본 도쿄에서 맞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이 날 있었던 일정이 일정이었던 만큼 다른 이벤트는 없었지만, 하루 내내 남자애들이 '생일빵'을 언급했기에 이 폭력적(?)인 한국문화에 오노데라 선생님이 문화충격을 받은 것은 하나 기억해 둘 점이겠다.
##다큐멘터리 영화 '카케하시' 관람
카케하시(かけはし), 즉 가교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내가 이 연수에 지원할 때 이수현씨에 대해 알아보다가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이 거의 다 되었다는 기사를 우연히 읽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개봉일도 2017년 초로, 잘 하면 우리의 일정에 이 영화 관람이 포함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일본에 도착해서 확인해 본 결과, 우리의 일정에 관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침 때를 맞춰 이 뜻깊은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 자체는 독립영화로, 상영도 일반 영화관에서 하는 것이 아닌, 독립영화관이나 요청에 따른 소규모 공동체 상영과 같은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듯 했다. 우리도 도쿄 시부야에 위치한 UPLINK라는 한 독립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영화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1장 I am a Bridge는 이수현씨에 관한 내용과, 이수현씨의 이름을 딴 엘에스에이치아시아장학회(エルエスエイチアジア奨学会)에서 장학금을 받아 일본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다룬 내용이었다. 엘에스에이치가 무슨 뜻인가 했더니 LSH, 즉 이수현씨의 이니셜이었다. 일본 정식 명칭에서 로마자를 안 쓰는 만큼, 여기에서도 발음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이수현씨에 관한 내용이야 이 연수에 지원하면서, 또 연수에 와서도 게속 마주쳤던 내용들이어서, 어떻게 보면 아는 내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아 이수현씨와 비슷하게 여러 일본어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는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보면 이수현씨의 유지를 이어받아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에도 나오듯, 벌써 그 사고가 있은지 16년(2018년 1월 현재 만 17년)이 지나서 사람들의 관심이나 후원도 예전같지 않아 장학회 자체도 초기에 비해서 재정적 면에서 많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제작된 것 자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래도 이수현씨를 기억하고, 그의 뜻을 이어가려는 의지는 이어져 내려오는 것 같아 희망 또한 볼 수 있었다. 참고로 2002년 이수현씨 1주기에 장학회가 설립된 이후, 2017년 10월 기준으로 지금까지 15년동안 18개국에서 온 844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제 2장 足跡をたどって (발자취를 따라서)는 이수현씨의 고향인 부산에서 온 대학생 20여명이 일본에 와서 1주일간 교류하며 일본인과 홈스테이 등을 하고 이수현씨 관련 장소들을 찾아가는 연수를 내내 밀착취재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간 청소년방일연수와 비슷한 성격의 연수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은 크게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이수현씨 등을 기억하고 일본에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일본인들과 인연을 쌓아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그래서 같이 본 연수단원 중에서는 1장에 비해 관련성도 떨어지고 주는 메시지도 그에 비해서는 약하다는 평을 한 이도 있었다. 물론 크게 이수현씨나 그와 직접 관계된 활동이 아니었기에 나름 일리있는 평이다. 하지만 나는, 이수현씨라는 특수성에 맞춰졌던 1장에 대비해 2장은 누구나 참여해 볼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균형을 맞춰주었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 이외에 여러 한국인들이 이수현씨를 기억하고, 또 일본과의 인연을 쌓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기에 2장 또한 의미있었고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개인적으로는 2장을 보면서, 청소년방일연수도 한번 깊이있게 다뤄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6년동안이나 이어져오는 청소년방일연수도 소개하고, OB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 지 추적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실제로 우리 연수단 동문회를 가더라도 가장 오래된 OB가 8기 정도라서 그 위의, 지금은 30대 후반이 다 되었을 초기 OB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 이 연수가 나름 역사가 있는 만큼, 연수를 통해 한국과 일본 사이, 아니더라도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길러져 나왔는지를 소개했더라면 더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카케하시(かけはし), 즉 가교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내가 이 연수에 지원할 때 이수현씨에 대해 알아보다가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이 거의 다 되었다는 기사를 우연히 읽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개봉일도 2017년 초로, 잘 하면 우리의 일정에 이 영화 관람이 포함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일본에 도착해서 확인해 본 결과, 우리의 일정에 관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침 때를 맞춰 이 뜻깊은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 자체는 독립영화로, 상영도 일반 영화관에서 하는 것이 아닌, 독립영화관이나 요청에 따른 소규모 공동체 상영과 같은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듯 했다. 우리도 도쿄 시부야에 위치한 UPLINK라는 한 독립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영화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 1장 I am a Bridge는 이수현씨에 관한 내용과, 이수현씨의 이름을 딴 엘에스에이치아시아장학회(エルエスエイチアジア奨学会)에서 장학금을 받아 일본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다룬 내용이었다. 엘에스에이치가 무슨 뜻인가 했더니 LSH, 즉 이수현씨의 이니셜이었다. 일본 정식 명칭에서 로마자를 안 쓰는 만큼, 여기에서도 발음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이수현씨에 관한 내용이야 이 연수에 지원하면서, 또 연수에 와서도 게속 마주쳤던 내용들이어서, 어떻게 보면 아는 내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아 이수현씨와 비슷하게 여러 일본어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는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보면 이수현씨의 유지를 이어받아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에도 나오듯, 벌써 그 사고가 있은지 16년(2018년 1월 현재 만 17년)이 지나서 사람들의 관심이나 후원도 예전같지 않아 장학회 자체도 초기에 비해서 재정적 면에서 많이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제작된 것 자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래도 이수현씨를 기억하고, 그의 뜻을 이어가려는 의지는 이어져 내려오는 것 같아 희망 또한 볼 수 있었다. 참고로 2002년 이수현씨 1주기에 장학회가 설립된 이후, 2017년 10월 기준으로 지금까지 15년동안 18개국에서 온 844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제 2장 足跡をたどって (발자취를 따라서)는 이수현씨의 고향인 부산에서 온 대학생 20여명이 일본에 와서 1주일간 교류하며 일본인과 홈스테이 등을 하고 이수현씨 관련 장소들을 찾아가는 연수를 내내 밀착취재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간 청소년방일연수와 비슷한 성격의 연수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은 크게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이수현씨 등을 기억하고 일본에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일본인들과 인연을 쌓아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그래서 같이 본 연수단원 중에서는 1장에 비해 관련성도 떨어지고 주는 메시지도 그에 비해서는 약하다는 평을 한 이도 있었다. 물론 크게 이수현씨나 그와 직접 관계된 활동이 아니었기에 나름 일리있는 평이다. 하지만 나는, 이수현씨라는 특수성에 맞춰졌던 1장에 대비해 2장은 누구나 참여해 볼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균형을 맞춰주었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 이외에 여러 한국인들이 이수현씨를 기억하고, 또 일본과의 인연을 쌓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기에 2장 또한 의미있었고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개인적으로는 2장을 보면서, 청소년방일연수도 한번 깊이있게 다뤄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6년동안이나 이어져오는 청소년방일연수도 소개하고, OB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 지 추적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실제로 우리 연수단 동문회를 가더라도 가장 오래된 OB가 8기 정도라서 그 위의, 지금은 30대 후반이 다 되었을 초기 OB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 이 연수가 나름 역사가 있는 만큼, 연수를 통해 한국과 일본 사이, 아니더라도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길러져 나왔는지를 소개했더라면 더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카케하시 포스터
##시부야 자유행동
영화를 본 뒤에는 도쿄의 주도심 중 하나인 시부야역 앞 교차로로 향했다. 일본에 관련된 뉴스가 나오면 으레 배경으로 깔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건너는 모습을 보여주는 스크램블 교차로가 위치한 바로 그곳이다. 물론 스크램블 교차로 자체는 일본 전역에 많지만, 시부야의 교차로가 일본 전국을 통틀어 하루에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위치한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매일 기다리다 죽었다는 충견, 하치의 동상은 약속장소 및 기념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유롭게 흩어져 점심을 먹게 되었다. 나는 윤호와 함께 모스버거에 가서 햄버거를 먹었다. 아쉽지만 나는 평소에 햄버거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 맛 품평은 못하겠다. 하지만, 버거 자체보다 거의 일본에서만 마실 수 있는 탄산음료인 메론소다는 나름 신선한 체험이었다. 한국에서도, 좀 더 자주 접할 수 있었다면 아마 더 사먹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달면서도 탄산 맛이 느껴지는 그런 음료였다.
이후 우리 둘은 인근 대형서점에 들렀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일본에서도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기회가 되지 않아 서점을 들러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한번 가보게 되었다. 홈스테이를 다룬 4편에서도 언급했지만, 특히 일본에서 구하고 싶은 책은 일본 교과서였다. 역사나 공민(=사회) 등, 논란이 많은 교과서를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내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아마도 일본도 한국처럼 교과서는 총판을 통해서만 공급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참고서와 문제집이 전부였고, 그것들은 '교과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내 성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도 내 소망은 뒤로 미루고 대신에 다른 읽을 만한 책이 있는지 찾아나섰다.
일본서점의 특이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일본인들이 쓴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영미권과 일본을 비롯해 다양한 나라의 책들의 번역본들을 자주 접하고, 이러한 외국 책들이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와 있는 것도 일상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출판대국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자국민들이 쓴 책을 훨씬 선호하는 것 같았다. 패션이나 음식, 자기계발서류와 같이 일본의 컨텐츠가 강세를 보이는 실용서들은 물론 일본인이 쓴 책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를 넘어, 외국의 사상이나 역사, 인물을 소개하는 책도 꼭 일본인이 관련 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한 책이 나오고, 사람들도 원전보다는 그런 책들을 사서 읽는 듯 했다. 소설도 일본소설 등 세계 각국의 문학을 읽는 사람이 많은 한국보다, 일본 작가들이 쓴 소설이 더욱 많이 팔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일본에서 사람들이 다가가기 쉬운 대중소설류의 책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어 접근장벽이 낮은 편이기는 하고, 최근까지의 한국문학작품은 어딘가 딱딱하게 느껴지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또한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국문학이 자국민들에게 다소 외면받고 있는 한국에서 온 나는 이유야 무엇이건 간에, 일본의 활발한 출판 내수시장이 마냥 부러웠을 따름이다.
결국 내가 이곳에서 집어들고 나온 책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コンビニ人間(편의점 인간)'이었다. 이전부터 읽고 싶어하던 책 중 한권이지만 여유가 없어 못 읽던 차에 일본에 왔으니 원서로 읽어보자는 느낌으로 사게 되었다. 이 책은 현대 사회가 낳은 사람의 한 유형을 보여주며, 그런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과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특히, 프리터나 초식남 등의 단어로 대표되는, 시스템에 눌린 일본 젊은이들의 다소 무기력한 삶이, 지금의 한국인들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미묘한 공감을 하면서 읽은 책이기도 하다. 일본 뿐만이 아닌 지금 청년세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 읽어보면 좋은 책이라 생각해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다.
영화를 본 뒤에는 도쿄의 주도심 중 하나인 시부야역 앞 교차로로 향했다. 일본에 관련된 뉴스가 나오면 으레 배경으로 깔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건너는 모습을 보여주는 스크램블 교차로가 위치한 바로 그곳이다. 물론 스크램블 교차로 자체는 일본 전역에 많지만, 시부야의 교차로가 일본 전국을 통틀어 하루에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위치한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매일 기다리다 죽었다는 충견, 하치의 동상은 약속장소 및 기념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유롭게 흩어져 점심을 먹게 되었다. 나는 윤호와 함께 모스버거에 가서 햄버거를 먹었다. 아쉽지만 나는 평소에 햄버거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 맛 품평은 못하겠다. 하지만, 버거 자체보다 거의 일본에서만 마실 수 있는 탄산음료인 메론소다는 나름 신선한 체험이었다. 한국에서도, 좀 더 자주 접할 수 있었다면 아마 더 사먹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달면서도 탄산 맛이 느껴지는 그런 음료였다.
이후 우리 둘은 인근 대형서점에 들렀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일본에서도 서점이나 도서관에 들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기회가 되지 않아 서점을 들러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한번 가보게 되었다. 홈스테이를 다룬 4편에서도 언급했지만, 특히 일본에서 구하고 싶은 책은 일본 교과서였다. 역사나 공민(=사회) 등, 논란이 많은 교과서를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내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아마도 일본도 한국처럼 교과서는 총판을 통해서만 공급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참고서와 문제집이 전부였고, 그것들은 '교과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내 성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도 내 소망은 뒤로 미루고 대신에 다른 읽을 만한 책이 있는지 찾아나섰다.
일본서점의 특이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일본인들이 쓴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영미권과 일본을 비롯해 다양한 나라의 책들의 번역본들을 자주 접하고, 이러한 외국 책들이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와 있는 것도 일상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출판대국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자국민들이 쓴 책을 훨씬 선호하는 것 같았다. 패션이나 음식, 자기계발서류와 같이 일본의 컨텐츠가 강세를 보이는 실용서들은 물론 일본인이 쓴 책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를 넘어, 외국의 사상이나 역사, 인물을 소개하는 책도 꼭 일본인이 관련 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한 책이 나오고, 사람들도 원전보다는 그런 책들을 사서 읽는 듯 했다. 소설도 일본소설 등 세계 각국의 문학을 읽는 사람이 많은 한국보다, 일본 작가들이 쓴 소설이 더욱 많이 팔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일본에서 사람들이 다가가기 쉬운 대중소설류의 책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어 접근장벽이 낮은 편이기는 하고, 최근까지의 한국문학작품은 어딘가 딱딱하게 느껴지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또한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국문학이 자국민들에게 다소 외면받고 있는 한국에서 온 나는 이유야 무엇이건 간에, 일본의 활발한 출판 내수시장이 마냥 부러웠을 따름이다.
결국 내가 이곳에서 집어들고 나온 책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コンビニ人間(편의점 인간)'이었다. 이전부터 읽고 싶어하던 책 중 한권이지만 여유가 없어 못 읽던 차에 일본에 왔으니 원서로 읽어보자는 느낌으로 사게 되었다. 이 책은 현대 사회가 낳은 사람의 한 유형을 보여주며, 그런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과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특히, 프리터나 초식남 등의 단어로 대표되는, 시스템에 눌린 일본 젊은이들의 다소 무기력한 삶이, 지금의 한국인들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 미묘한 공감을 하면서 읽은 책이기도 하다. 일본 뿐만이 아닌 지금 청년세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 읽어보면 좋은 책이라 생각해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다.
신오쿠보 역에서의 헌화 (촬영: 간사이 센터)
##신오쿠보 역 방문 및 헌화
이후 우리는 이수현씨가 일본인 사진작가 세키네 시로씨와 함께,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생을 마감하고 마신 장소인 JR 신오쿠보역으로 향했다. 원래부터 신오쿠보역 주변에는 재일교포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고 했다. 이후 일본에서 한류가 절정기에 이르렀던 시절에는 관련 상품으로 호황을 누렸던 상가라고도 했다. 한편으론, 근 몇년간 혐한정서가 확산되면서 극우들의 혐한시위가 자주 열려 많은 피해를 받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우리가 신오쿠보를 방문했을 때에도 규모는 줄어든 듯 했으나 거리에서 여전히 수많은 한글간판을 볼 수 있었고, 상가에서도 한국 아이돌 굿즈들을 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광경들을 지나 신오쿠보역으로 향했다.
내가 놀랐고, 감사했던 것 중 하나는 신오쿠보 역 방문 내내 JR동일본에서 큰 협조와 지원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방문은 그래도 신오쿠보 역에서 매년 열리는 행사 중 하나에 속하므로, 어느 정도의 기대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넘치는 대우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먼저, 우리가 역 인근에서 버스에서 내렸을 때부터 JR동일본에서 관계자분이 나와서 우리를 신오쿠보 역으로 인솔해 주셨다. 우리가 역에 들어가 처음 한 것이 역 출입구 계단 중간에 설치된 추모 글판 앞에 헌화하고 묵념하는 것이었다. 출입구 층계참에 위치한 지라 다소 혼잡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복을 입은 역원이 몇분이나 나오셔서 추도행사를 진행하는 우리를 둘러싸 안전을 유지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주변 이용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안내말씀을 외쳐주셨다. 나는 비록 그 중심에 있어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덕분에 이후에 사진으로 보니 나름 엄숙미가 흘러나오는 장면이 된 것 같다.
이후 우리는 플랫폼으로 올라가 이수현씨가 추락한 지점앞에 섰다. 이 과정에서도 역장으로 보이시는 분이 나오셔서 설명을 해 주시는 등 편의를 베풀어 주셨다. 신오쿠보역이 지상역인 만큼 플랫폼에는 가슴높이의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왠만하면 사람 키를 넘는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한국의 지하철, 전철역에 비해 정작 철도대국 일본에는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역이 많은 편이다. 나는 그 스크린도어를 보면서 이수현씨의 사고 이후 스크린도어 설치가 확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조심스레 해 보았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묵념.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에 헌화는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지하철 역에서 사고가 나면 스크린도어에 추모하는 내용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고 그 앞에 헌화 등을 하는데, 일본에서는 문화의 차이가 있어 힘들 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순서도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우리는 역 이용객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플랫폼 끝으로 이동해 기념사진을 찍고 신오쿠보 역을 떠났다.
이후 우리는 이수현씨가 일본인 사진작가 세키네 시로씨와 함께,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생을 마감하고 마신 장소인 JR 신오쿠보역으로 향했다. 원래부터 신오쿠보역 주변에는 재일교포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고 했다. 이후 일본에서 한류가 절정기에 이르렀던 시절에는 관련 상품으로 호황을 누렸던 상가라고도 했다. 한편으론, 근 몇년간 혐한정서가 확산되면서 극우들의 혐한시위가 자주 열려 많은 피해를 받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우리가 신오쿠보를 방문했을 때에도 규모는 줄어든 듯 했으나 거리에서 여전히 수많은 한글간판을 볼 수 있었고, 상가에서도 한국 아이돌 굿즈들을 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광경들을 지나 신오쿠보역으로 향했다.
내가 놀랐고, 감사했던 것 중 하나는 신오쿠보 역 방문 내내 JR동일본에서 큰 협조와 지원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방문은 그래도 신오쿠보 역에서 매년 열리는 행사 중 하나에 속하므로, 어느 정도의 기대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넘치는 대우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먼저, 우리가 역 인근에서 버스에서 내렸을 때부터 JR동일본에서 관계자분이 나와서 우리를 신오쿠보 역으로 인솔해 주셨다. 우리가 역에 들어가 처음 한 것이 역 출입구 계단 중간에 설치된 추모 글판 앞에 헌화하고 묵념하는 것이었다. 출입구 층계참에 위치한 지라 다소 혼잡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복을 입은 역원이 몇분이나 나오셔서 추도행사를 진행하는 우리를 둘러싸 안전을 유지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주변 이용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안내말씀을 외쳐주셨다. 나는 비록 그 중심에 있어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덕분에 이후에 사진으로 보니 나름 엄숙미가 흘러나오는 장면이 된 것 같다.
이후 우리는 플랫폼으로 올라가 이수현씨가 추락한 지점앞에 섰다. 이 과정에서도 역장으로 보이시는 분이 나오셔서 설명을 해 주시는 등 편의를 베풀어 주셨다. 신오쿠보역이 지상역인 만큼 플랫폼에는 가슴높이의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왠만하면 사람 키를 넘는 스크린도어가 설치된 한국의 지하철, 전철역에 비해 정작 철도대국 일본에는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역이 많은 편이다. 나는 그 스크린도어를 보면서 이수현씨의 사고 이후 스크린도어 설치가 확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조심스레 해 보았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묵념.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에 헌화는 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지하철 역에서 사고가 나면 스크린도어에 추모하는 내용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고 그 앞에 헌화 등을 하는데, 일본에서는 문화의 차이가 있어 힘들 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순서도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우리는 역 이용객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플랫폼 끝으로 이동해 기념사진을 찍고 신오쿠보 역을 떠났다.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 방문
신오쿠보 역을 나와서 우리는 닛포리 역 인근의 아카몬카이(赤門会) 일본어학교로 향했다. 그 곳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치는, 한국 개념으로 하면 사설 어학당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이수현씨가 생전에 일본에 와서 일본어를 배우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도 이수현씨를 기억하려는 노력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일본어학교 건물 앞의 학생(이라고 해도 다들 성인이다)들이 내뿜는 자욱한 담배연기를 헤치고 가자, 앞 빈 터에 동백나무가 보였다. 일본어학교에서 선생님 한 분이 나와서 설명하시기를, 부산 출신인 이수현씨를 기념하고자 부산을 상징하는 나무인 동백나무를 심은 것이락 했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앞 벽에는 '이수현씨 기념공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수현씨에 대한 간단한 소개글, 이수현씨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과연 이 학교에 다니는 사람 중 얼마나 되는 사람이 이수현씨에 대해 관심을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그런 식으로 이수현씨에 관한 기억이 계속 이어지는 것에 대해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신오쿠보 역을 나와서 우리는 닛포리 역 인근의 아카몬카이(赤門会) 일본어학교로 향했다. 그 곳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치는, 한국 개념으로 하면 사설 어학당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이수현씨가 생전에 일본에 와서 일본어를 배우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도 이수현씨를 기억하려는 노력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일본어학교 건물 앞의 학생(이라고 해도 다들 성인이다)들이 내뿜는 자욱한 담배연기를 헤치고 가자, 앞 빈 터에 동백나무가 보였다. 일본어학교에서 선생님 한 분이 나와서 설명하시기를, 부산 출신인 이수현씨를 기념하고자 부산을 상징하는 나무인 동백나무를 심은 것이락 했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앞 벽에는 '이수현씨 기념공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수현씨에 대한 간단한 소개글, 이수현씨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과연 이 학교에 다니는 사람 중 얼마나 되는 사람이 이수현씨에 대해 관심을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그런 식으로 이수현씨에 관한 기억이 계속 이어지는 것에 대해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일본어학교 앞 동백나무 (촬영: 간사이 센터)
일본어학교에 들어가자, 마침 이수현씨의 기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우리가 와서인지 이수현씨의 사진과 엘에스에이치아시아 장학회와 관련된 소식지들이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번 둘러본 뒤, 윗층으로 올라가자 우리는 한 교실로 안내되어 일본어학교 원장님의 인삿말을 들었다. 여기에서는 다른 활동들도 계획되어 있었다. 우리는 약 4개 조로 나누어져 각각 일본어학교의 선생님들과 함께 간단한 수업활동을 체험했다. 처음에는 일본어 실력으로 조를 나누자고 하셨는데, 이 연수단에 참가한 사람들이 다들 엇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보니 그냥 임의로 모여 조를 구성하게 되었다. 내가 속한 조에서는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자신이 일본에 관해 가지고 있는 관심사 등을 나누는 프리토크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적 있지만, 사전과제로 제출한 자기소개서의 내용은 이 활동에서도 유용하게 쓰였다. 선생님들은 우리의 일본어 실력이 엄청 유창하다며 칭찬해 주셨다. 물론 좋은 말을 해 주려는 것도 섞여 있었겠지만, 듣자 하니 일본어를 전혀 못 하는 성인들이 이곳에 처음 와서 히라가나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는 듯 했다. 아마 그런 학생들도 많은 가운데서 우리 연수단처럼 이미 일본어를 좀 하는 사람, 그것도 고등학생들을 만나니, 더욱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그만큼, 말을 할 수 없어도 일본에 각자 나름의 꿈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같아,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활동을 하면서 일본어학교 측에서 상당히 많은 과자와 주스를 준비해 주셨는데 결국 우리는 그것들을 다 먹지 못하고 가져오게 되었다. 다들 과자를 한아름 안고 오면서, '우리가 인사 드리러 갔는데 되레 선물만 엄청 얻어간다'라면서 버스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곳에서 우리는 엘에스에이치아시아장학회에서 연 2회 발간하는 소식지인 '카케하시(かけはし, 가교)'도 받아왔는데, 우리가 오전에 본 다큐영화 '카케하시'의 제2장에 나와 교류를 진행한 대학생들이 쓴 후기가 실려있었다. 이후 우리는 한국에 돌아와서 '카케하시'를 한 부 더 배달받았는데, 그 호에는 우리의 이야기와 단원들이 쓴 후기 중 몇 편이 실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카몬카이 학교에서 (촬영: 간사이 센터)
##숙소 인근 둘러보기
이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이 날은 숙소에 일찍 도착하게 되어있던지라, 도착 이후 해산해서 각자 저녁을 해결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오노데라 선생님은 호텔 주변은 돌아다녀도 되되, 22시 이전에는 방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안내말씀을 주셨다. 우리는 버거킹에서 저녁을 해결한 후, 건물을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같이 나온 몇명과 상의한 결과 두 팀으로 나눠져서 한 팀은 인근 게임방을 들러보고, 내가 속한 팀은 중고서점인 북오프에 가 보기로 했다. 거리가 지하철 한 역 정도 떨어져 있긴 했지만 충분히 걸어서 갈 거리였고, 도쿄의 거리도 한번 걸어보고 싶었기에 우리는 걸어서 각자 목표했던 지점으로 갔다. 중고서점을 둘러보았지만 책은 크게 사고 싶은 것이 보이지 낳았다. 같이 간 몇은 라이트노벨 원서를 몇권 사긴 했지만,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으므로 패스. 결국 북오프에 딸린 중고 음반서점에서 '너의 이름은' OST 앨범을 사 왔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이고, 지금껏 그가 감독한 영화들은 다 봤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작 가장 크게 히트한 '나의 이름은'를 별로 재미없게 본 편이다. 하지만 OST 자체는 좋았기에, 사볼까 생각하고 있던 참에 마침 눈에 들어와서 사게 되었다. 특별판이나 해당 앨범의 첫 주인 같은 감성적인 면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라 중고판이 오히려 가격 면에서도 괜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호텔로 돌아와서, 몇명이 생일선물이라며 편의점에서 사온 빵을 같이 나눠먹었다. 다행히 그토록 하루 내내 남자애들이 떠들어 댄 다른 '생일빵'은 없었다.
이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이 날은 숙소에 일찍 도착하게 되어있던지라, 도착 이후 해산해서 각자 저녁을 해결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오노데라 선생님은 호텔 주변은 돌아다녀도 되되, 22시 이전에는 방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안내말씀을 주셨다. 우리는 버거킹에서 저녁을 해결한 후, 건물을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같이 나온 몇명과 상의한 결과 두 팀으로 나눠져서 한 팀은 인근 게임방을 들러보고, 내가 속한 팀은 중고서점인 북오프에 가 보기로 했다. 거리가 지하철 한 역 정도 떨어져 있긴 했지만 충분히 걸어서 갈 거리였고, 도쿄의 거리도 한번 걸어보고 싶었기에 우리는 걸어서 각자 목표했던 지점으로 갔다. 중고서점을 둘러보았지만 책은 크게 사고 싶은 것이 보이지 낳았다. 같이 간 몇은 라이트노벨 원서를 몇권 사긴 했지만,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으므로 패스. 결국 북오프에 딸린 중고 음반서점에서 '너의 이름은' OST 앨범을 사 왔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이고, 지금껏 그가 감독한 영화들은 다 봤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작 가장 크게 히트한 '나의 이름은'를 별로 재미없게 본 편이다. 하지만 OST 자체는 좋았기에, 사볼까 생각하고 있던 참에 마침 눈에 들어와서 사게 되었다. 특별판이나 해당 앨범의 첫 주인 같은 감성적인 면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라 중고판이 오히려 가격 면에서도 괜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호텔로 돌아와서, 몇명이 생일선물이라며 편의점에서 사온 빵을 같이 나눠먹었다. 다행히 그토록 하루 내내 남자애들이 떠들어 댄 다른 '생일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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