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이수현씨기념방일연수 후기 (5) - 교토연수여행(2/12-2/13)
#2월 12일, 교토 첫날
전날 홈스테이를 하고 오사카 시내를 돌아다니고 와서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다음 날, 알람을 못 듣고 자버리고 말았다. 결국, 나를 찾는 오오니시 선생님의 전화가 방에 걸려온 걸 듣고서야 깨어나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로비 앞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로 뛰어내려갔다. 전날 짐을 미리 챙겨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민폐만 엄청나게 끼치면서 교토여행을 시작할 뻔 했다. 이 글을 읽게 될 후배 연수생들을 위해 꼭 알람을 크게 맞춰놓고, 옆 방 친구에게 깨워줄 것을 부탁해 놓으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스미마셍을 수 번을 외치면서 버스에 들어가서 구석 자리에 앉으니 버스는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약 한시간 반을 달리니 교토에 도착했다. 내가 머무른 간사이 센터가 간사이 국제공항과 가까이 있어, 오사카 시내까지 가는 데 30분, 오사카 시내에서 교토까지 한시간 걸렸기 때문이다.
전날 홈스테이를 하고 오사카 시내를 돌아다니고 와서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다음 날, 알람을 못 듣고 자버리고 말았다. 결국, 나를 찾는 오오니시 선생님의 전화가 방에 걸려온 걸 듣고서야 깨어나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로비 앞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로 뛰어내려갔다. 전날 짐을 미리 챙겨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민폐만 엄청나게 끼치면서 교토여행을 시작할 뻔 했다. 이 글을 읽게 될 후배 연수생들을 위해 꼭 알람을 크게 맞춰놓고, 옆 방 친구에게 깨워줄 것을 부탁해 놓으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스미마셍을 수 번을 외치면서 버스에 들어가서 구석 자리에 앉으니 버스는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약 한시간 반을 달리니 교토에 도착했다. 내가 머무른 간사이 센터가 간사이 국제공항과 가까이 있어, 오사카 시내까지 가는 데 30분, 오사카 시내에서 교토까지 한시간 걸렸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센본도리이 터널 (촬영: 간사이 센터)
##후시미이나리 신사
가장 먼저 들른른 곳이 후시미이나리 신사(伏見稲荷大社) 였다. 후시미이나리 신사는 낙남(落南)에 위치해 있는 상업의 신을 모신 신사이다. 참고로 낙남이라 함은, 교토의 옛 이름인 낙양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이와 같이 교토 시내 구역을 나눌 때 낙북 낙중 낙서, 낙동 등으로 나눈다고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1박 2일동안 우리를 안내해 줄 가이드 분을 만났다. 흔히 관광 가이드들이 쓰는 깃발 대신 봉에 꽃을 달아 들고 다니시는 분이었는데, 이분과 같이 다니며 이후에도 교토에 관한 많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후시미이나리 신사는 상업의 신을 모신 곳으로, 이 신사의 명물 중 하나인 센본도리이(千本鳥居)도 이와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원래 농업의 신을 모시던 곳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상업의 신을 모시게 되었는데, 그 신이 전국의 상인들에게 참배를 받으며 훨씬 인기가 많아지자 신사가 전업(?)을 해서 현재의 신사가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름에 벼(稻)가 들어있고, 신사 곳곳에 있는 여우들이 벼(곡식)와 열쇠(창고열쇠, 풍년&장사번창의 의미)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한다. 또, 우리에게는 다소 불편한 이름이지만, 교토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이름을 듣게 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곳과 관련이 있었다. 교토 전체를 불태운 오닌의 난 이후,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준 곳이라며 쌀 5천 석을 기부해 재건한 곳이 바로 이 신사의 본전(本殿)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또, 볼 수 있었던 하나의 진기한 풍경은 신사의 무녀들이 제를 올리는 풍경이었다. 때마침 '너의 이름은'이 한국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을 때였고, 우리 연수단원들이 그 영화를 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으니 다들 유명한 그 장면을 떠올리며 그 앞으로 모여들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가장 유명한 '그' 장면은 행해지지 않았지만, 나머지 무녀들의 동작들이 스크린에서 본 것과 너무 흡사해서 다들 꽤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철저히 사진촬영은 금지인 행사여서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한국 민속촌을 가다가 드라마 촬영(물론 이 제사는 실제로 행해지는 것이었다)을 맞닥뜨린 것과 비슷한 인상깊은 경험이었다.
이후로 향한 곳이 그 유명한 센본도리이이다. 상업의 신을 모신 이 신사에 자신의 사업이 번창하길 기원하는 전국의 사장님들이 하나씩 기진하여 지금은 온 산을 둘러서 도리이가 세워져 있다고 했다. 실제로 도리이에는 각자 기진한 이들의 이름과 회사명, 봉납일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을 살펴보니 거의 다 오래되어 봤자 헤이세이(平成) 10년대의 것이어서, 그 전에도 사업번창의 마음으로 도리이를 바쳤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일본인들의 일상과 신사가 얼마나 긴밀히 엮여있는지를 또 한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라시야먀 & 천룡사
그 다음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낙서의 아라시야마(嵐山)였다. 그 이름을 언급하면서 가이드 선생님이 친 아이돌 아라시 드립과 함께 우리는 고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가모 강(鴨川)을 건너 서쪽으로 향했다. 아라시야마는 가쓰라 강(桂川)을 건너는 도월교(渡月橋)의 풍경도 유명하지만, 천룡사(天龍寺)와, 천룡사 뒤의 대나무숲, 그리고 도월교에서 천룡사까지 이어지는 상가도 유명한 관광지이기에 들러 볼 만한 곳이 참 많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낙서의 아라시야마(嵐山)였다. 그 이름을 언급하면서 가이드 선생님이 친 아이돌 아라시 드립과 함께 우리는 고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가모 강(鴨川)을 건너 서쪽으로 향했다. 아라시야마는 가쓰라 강(桂川)을 건너는 도월교(渡月橋)의 풍경도 유명하지만, 천룡사(天龍寺)와, 천룡사 뒤의 대나무숲, 그리고 도월교에서 천룡사까지 이어지는 상가도 유명한 관광지이기에 들러 볼 만한 곳이 참 많다고 할 수 있다.
천룡사 뒷편 대나무숲
우리는 먼저 대나무숲으로 향했다. 영화에도 배경으로 자주 나오고 일본 죽도의 상당수가 그 죽림에서 만들어진다는 등 상당히 유명한 곳이었다. 실제로 들어가니 동양 무협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에 대나무가 하늘을 가려서 낮에도 밝지만은 않은 곳이었다. 대나무숲을 깊게 들어가지는 않고, 우리는 돌아나와 후문을 통해 천룡사로 들어갔다. 가이드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와 내가 이후에 찾아본 내용에 의하면 천룡사 자체는 무로마치 막부의 첫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자신이 쫓아낸 고다이고 천황의 원령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절이라고 한다. 또, 아라시야마에 심어져서, 벚꽃철이면 장관을 이루는 벚나무들도 고다이고천황이 살던 요시노에서 옮겨심은 벚나무라고 한다. 실제로 천룡사 안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넋을 모시는 다보전도 볼 수 있었다. 이외에 뒷뜰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관음상, 기도하면 그림을 잘 그리게 해준다는 거대한 벼루와 같은 것들도 있었지만, 그 것들은 짤막하게만 보고, 우리는 천룡사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정원으로 들어갔다.
천룡사의 정원은 조원지(曹源池)라는 이름을 가진 정원으로, 일본 특별명승지 1호이기도 한 유명한 곳이다. 실제로 주위 아라시야마의 경치까지 다 보일 수 있는 위치에 만들어 차경(借景)이라는 개념으로 주위의 경치와 정원의 경치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실제로 보니 참 아름다웠는데, 그 날이 약간 흐렸던지라 햇빛만 더 비췄더라면 더욱 좋은 풍경이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일본식 정원은 관조하는 대상이라는 개념으로 감상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생각이 차분해지는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말 만족스러운 자연광경을 제공하는 정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내 표현력으로는 묘사하기가 힘들다. 이 글을 읽는다면 꼭 한번 가보길 바란다. 방장 건물과 연못 사이에는 마른산수정원같이 자갈정원도 있었다. 때마침 거기서 자갈을 갈고 있는 스님이 계셔서 가이드 선생님이 그런 방식으로 정원을 가꾸는 것이 마음 수양의 한 방식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수양하면 자연은 물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심성을 가지게 되는 걸까. 항상 헛소리만 해대는 일본 정치인들은 그런 평화로운 문화를 제대로 즐기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여러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 장소였다.
천룡사 조원지, 날씨가 우중충해서 아쉽다
사실 천룡사에서 가장 볼 만한 것 중 하나는 법당 천장에 그려진 용 그림인 '운룡도'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그 그림은 또 요금을 내야 볼 수 있어, 우리는 보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천룡사를 나와서는 자유로이 점심을 먹기 위해 흩어졌다. 이때 나와 몇명은 식당들을 돌아다니다 아무래도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판단 하에,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먹기로 했다. 결국, 로손에 들어가서 도시락을 사기는 했지만, 먹을 곳이 없어서 돌아다니다가 도월교를 건너 강 건너편의 강가 공원에서 먹게 되었다.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면서 밥을 먹자니, 데워온 밥이 이미 다 식어있었다. 정말 추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괜찮은 경험이라고 자기합리화(?)하고 있다. 사실 내가 그쪽으로 이끌었다. 그때 같이 먹어준 친구들 미안...
원래 먹고살기 힘든 법이다 (영준&윤호)
##기타노덴만궁
이후 우리는 기타노덴만궁으로 향했다. 내가 홈스테이를 한 M과 같이 갔던 오사카덴만궁처럼, 이곳도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신 곳이었다. 역시 여기도 모두가 고등학생인 우리 연수단을 위해서 넣어준 순서이겠거니 했다. 여기서는 2월 중순인데 벌써부터 벚꽃이 피어 있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이외에 크게 볼 것은 없었지만, 소소하게 눈여겨 볼 점들이 있었다. 한 부위를 만지면 내 몸의 같은 부분이 좋아진다는, 그래서 다들 머리를 만진다는 청동 소. 양 콧구멍에 돌을 넣으면 부자가 된다는 돼지 석상이 그 예이다. 또, 이곳의 건물들은 지붕을 기와가 아닌, 편백나무(히노끼) 껍질로 덮은 일본특유의 지붕양식을 가진 건물이라고 한다.
본전에 들어가니 여기서에서도 참배를 했고, 나는 특별히 에마도 달았다. 에마에 ○○대학교 합격기원이라고 적어서 달았는데, 결국 합격할 수 있었으니 과연 이 곳의 신은 글로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 듯 하다. 이외에도 기타노덴만궁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연필 등, 학업에 특화된 신사 굿즈(?) 등을 팔고 있었다. 가이드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이곳에서 연필을 사가서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도 꽤 있다고 한다. 그런 문화를 볼 때 마다 일본인과 신사의 깊은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후 우리는 기타노덴만궁으로 향했다. 내가 홈스테이를 한 M과 같이 갔던 오사카덴만궁처럼, 이곳도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신 곳이었다. 역시 여기도 모두가 고등학생인 우리 연수단을 위해서 넣어준 순서이겠거니 했다. 여기서는 2월 중순인데 벌써부터 벚꽃이 피어 있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이외에 크게 볼 것은 없었지만, 소소하게 눈여겨 볼 점들이 있었다. 한 부위를 만지면 내 몸의 같은 부분이 좋아진다는, 그래서 다들 머리를 만진다는 청동 소. 양 콧구멍에 돌을 넣으면 부자가 된다는 돼지 석상이 그 예이다. 또, 이곳의 건물들은 지붕을 기와가 아닌, 편백나무(히노끼) 껍질로 덮은 일본특유의 지붕양식을 가진 건물이라고 한다.
본전에 들어가니 여기서에서도 참배를 했고, 나는 특별히 에마도 달았다. 에마에 ○○대학교 합격기원이라고 적어서 달았는데, 결국 합격할 수 있었으니 과연 이 곳의 신은 글로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 듯 하다. 이외에도 기타노덴만궁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연필 등, 학업에 특화된 신사 굿즈(?) 등을 팔고 있었다. 가이드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이곳에서 연필을 사가서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도 꽤 있다고 한다. 그런 문화를 볼 때 마다 일본인과 신사의 깊은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미키한 료칸
이후 우리는 교토 시내에 위치한 숙소인 미키한(三木半) 료칸으로 향했다. 료칸이라서 다른 숙소보다 더욱 기대되는 면이 있었는데, 다다미가 깔리고 도코노마도 있는 등 매체에 나오는 료칸 모습 그대로였다. 실내에서 입고 다닐 유카타도 준비되어 있었고, 이후에 밥을 먹고 오니 이불이 깔려 있는 등 서비스도 기대했던 것만큼이어서 정말 해볼 만한 체험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 생각해 보니 도코노마에 짐을 올려놓았던 것 같다. 그걸 종업원 분들이 다 보셨을 것을 생각하면...
이후 우리는 교토 시내에 위치한 숙소인 미키한(三木半) 료칸으로 향했다. 료칸이라서 다른 숙소보다 더욱 기대되는 면이 있었는데, 다다미가 깔리고 도코노마도 있는 등 매체에 나오는 료칸 모습 그대로였다. 실내에서 입고 다닐 유카타도 준비되어 있었고, 이후에 밥을 먹고 오니 이불이 깔려 있는 등 서비스도 기대했던 것만큼이어서 정말 해볼 만한 체험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 생각해 보니 도코노마에 짐을 올려놓았던 것 같다. 그걸 종업원 분들이 다 보셨을 것을 생각하면...
이 날 먹은 요리의 일부
이후에 우리는 유카타를 입고 와쇼쿠(和食) 정식도 먹고 욕실도 이용해 보는 등, 그야말로 제대로 된 료칸 서비스를 누렸다. 누가 일식 아니랄까봐, 해산물이 많아서 해산물을 잘 못 먹는 단원들은 좀 먹는 데 어려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맛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행히 나는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잘 먹을 수 있었다. 욕실은 그저 그랬던 것 같다. 덕분에 한편으론, 다음엔 꼭 온천지방에 가서 온천이 딸린 료칸에서 묵어보겠다는 생각이 더더욱 강해졌다.
남는 시간에 료칸을 나오니 인근이 바로 아케이드상가였다. 돌아다녀보니 드럭스토어, 옷집, 팬시스토어, 식당이 줄지어 섞여있고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교토에서 중심 상가 중 하나인 테라마치와 니시키 시장이었다. 옷을 충분히 가져오지 않은 영준이는 이 곳을 돌아다니다가 들어간 유니클로에서 후드티를 사서 나왔다. 나는 여기서도 딱히 쇼핑을 하지는 않았지만, 돌아다녀보니 오전에 본 교토의 역사와 전통적인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점이 내게 도시의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날 밤에는 다들 료칸에 있던 유카타를 입고 잤다. 원래 유카타가 속옷 없이 입는 옷인데, 다들 그대로 해본다고 최소한의 옷만 입고, 그 위에 유카타를 걸쳤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심각한 노출쇼(?)와 그를 이어서 이루어진 보이니 마니 하는 장난의 연속에서 같은 방의 모두가 식욕을 잃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매우 평온한 밤을 지낼 수 있었다.
료칸 안에서. 100% 설정샷 (뒤에 도코노마에...)
#2월 13일, 교토 둘쨋날
##청수사
다음날 아침 프론트에 집합한 우리는 다시 어제의 가이드 선생님을 만나 그 꽃봉을 따라 청수사(淸水寺)로 향했다. 일본 학생들이 수학여행지로 가장 많이 온다는 교토, 그 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장소 중 하나인 청수사에 간다는 말에 정말로 교토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이곳도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라서 그런지 사방에서 한중일 삼국의 언어가 각각 섞여들려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학교생활을 다룬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에는 꼭 나오는 장소이기도 해서 직접 눈으로 보고 싶기도 했다. 색깔이 좀 과하게 튀어보이는 삼중탑을 지나치고 본당쪽으로 향했다. , 옛날 어떤 장사가 신고 다녔다는 무쇠 나막신, 마찬가지로 그가 들고 다녔다는, 우리 연수단 남학생 네명이 붙어서 겨우 들었던 무쇠 지팡이 등을 지나자, 본당이 나왔다. 아쉽게도 청수사의 가장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본당 앞 무대는 보수공사중이어서,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 제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 무대의 스케일과 넓이가 대단하게 느껴졌고, 우리의 과제 중 하나였던 '청수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각오로'라는 말의 뜻, '죽을 각오로 무엇을 한다'를 느낄 수 있을만큼 높이도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었다. 사족으로 이후에 꼭 다시 와서,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본 모습을 보고 싶었으나, 1년 후에 다시 간 청수사는 본당까지 완전히 가건물로 덮어 전반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교토에 가야 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공사중이었던 청수사
이후 우리는 청수사에 딸린, 그러나 그 자체로도 유명한 지슈신사(地主神社)도 들어가 봤다. 그곳은 인연의 신을 모시는 곳이었다. 그 이름에 맞게, 연인들이 사랑 점을 치는 오미쿠지도 있었으며, 눈을 감고 한쪽 끝에서 똑바로 걸어가서 다른 쪽 끝에 닿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두 개의 돌도 볼 수 있었다. 나도 걸어봤지만 결과는… 아무래도 모든 신사가 다 글로벌하게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또 하나 청수사의 유명한 것으로는 오토와 폭포(音羽の滝)가 있다. 지혜, 수명, 인연을 상징하는 세 갈래의 물줄기가 떨어지는 곳으로, 두 개 까지 마시면 둘 다 이루어질 수 있지만, 세 줄기를 다 마시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나도 두 줄기가 지혜와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마셨다. 지혜는 어느 정도 향상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인연은… 수명을 늘여주는 물줄기를 착각해서 마셨나 하고 생각하고 있다.
##유젠조메 체험
점심은 교토 시내의 뷔페식 식당에서 먹었다. 여기서 경험한 하나의 컬쳐쇼크는 뷔페음식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제외한 다른 음료가 별도구매였다는 것. 그래서 당연히 음료는 연수 예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이미 몇명은 멋모르고 생과일주스를 가져다 마신 후였다. 그리고 그들은 "삼뱌쿠엔데스~(300엔입니다)"하고 값을 부르는 직원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돈을 낸 트라우마와 함께 그 식당을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우리는 교토 전통 방식의 염색인 유젠조메(友禅染)를 체험하러 갔다. 우리가 체험한 유젠조메는, 일종의 스텐실기법으로, 물감을 일정한 모양의 구멍이 뚫린 종이에 발라서, 그 아래쪽의 염색하고자 하는 천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의 염색이었다. 우리가 들어가니 각자에게 아무 모양이 없는 새 토트백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곳 직원분이 여러가지 그림 시안을 주시고는 그것들을 조합하여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했다. 다들 자신의 그림을 그렸고, 나도 기모노 입은 여인과 달을 조합해서 달 뜬 밤의 일본 여인을 그렸다. 이후 그 위에 다림질을 해서 최종 완성을 했지만, 슬프게도 한국에 와서 쓰다 어느 순간 잃어버려서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점심은 교토 시내의 뷔페식 식당에서 먹었다. 여기서 경험한 하나의 컬쳐쇼크는 뷔페음식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제외한 다른 음료가 별도구매였다는 것. 그래서 당연히 음료는 연수 예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이미 몇명은 멋모르고 생과일주스를 가져다 마신 후였다. 그리고 그들은 "삼뱌쿠엔데스~(300엔입니다)"하고 값을 부르는 직원 앞에 눈물을 흘리며 돈을 낸 트라우마와 함께 그 식당을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우리는 교토 전통 방식의 염색인 유젠조메(友禅染)를 체험하러 갔다. 우리가 체험한 유젠조메는, 일종의 스텐실기법으로, 물감을 일정한 모양의 구멍이 뚫린 종이에 발라서, 그 아래쪽의 염색하고자 하는 천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의 염색이었다. 우리가 들어가니 각자에게 아무 모양이 없는 새 토트백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곳 직원분이 여러가지 그림 시안을 주시고는 그것들을 조합하여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면 된다고 했다. 다들 자신의 그림을 그렸고, 나도 기모노 입은 여인과 달을 조합해서 달 뜬 밤의 일본 여인을 그렸다. 이후 그 위에 다림질을 해서 최종 완성을 했지만, 슬프게도 한국에 와서 쓰다 어느 순간 잃어버려서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토트백에 그린 그림
##리츠메이칸 대학교 교류
교토의 마지막 일정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관서지방의 명문 사립대 중 하나인 리츠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学)이었다. 교토 인구가 150만명인데 그 중 10%가 학생이라고 한다. 그 학생들이 다니는 대학들로는 리츠메이칸 이외에도 구 제국대학 중 하나인 교토대학, 윤동주가 나온 것으로 유명한 도시샤대학(同支社大学)도 있다. 또한 리츠메이칸은 도시샤와 함께 '칸칸도리츠(関関同立)', 즉 관서 지방에서 유명한 4개 사립대학 중 한 곳으로서 대학도시로서의 교토의 이름을 유지하는 데에서 빼먹을 수 없는 대학이라고 한다. 참고로 '칸칸도리츠'를 이루는 네 학교 중 다른 두 곳은 칸사이대학(関西大学)과 칸세이가쿠인대학(関西学院大学)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굳어져 버린 'SKY' 이외에는 대학 이름을 나열하거나 소위 '급'을 지칭하는 단어들(서성한, 지거국, 등등)같은 단어가 대학 서열화 조장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없지 않은데, 일본인들은 그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 또, 한국의 경우에는 '인서울'이란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단 서울 소재 대학교를 더 높게 보고, 그 다음으로 지방(거점국립대는 그나마 버티는 것 같지만 이외는...)대학교를 쳐주는 반면, 일본은 구 제국대학이나 위와 같은 '칸칸도리츠'와 같이 지방에 있는 대학교들도 높게 쳐 주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보다 지방에 대한 대우가 낫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지역을 벗어나려는 경향이 덜한 점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며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된 한국에 비해, 지방이 좀 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본이 더 나은 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때까지 우리를 인솔해 주신 요시모토 선생님 말고도 오노데라 선생님과도 합류했다. 히라이 가이치로 기념도서관에 도착하자, RIRIE라는, 일종의 국제 홍보 동아리에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간단한 대학 소개가 있고 나서, 우리는 조별로 동아리 구성원들과 1:5로 프리토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 이야기가 나왔었고, 한 분과 30분씩,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분은 특히 또 재일교포 분이었는데, 일본에서의 재일교포에게 이뤄지는 차별과 같은 경험도 들을 수 있어서 그 대목에서는 마음이 씁쓸해지는 면이 없지않아 있었다.
프리토크 이후 있었던 것이 국제관계학부 문경수(文京洙) 교수님의 특강이었다. 이 분도 마찬가지로 재일교포 출신으로, 일본에서의 시각으로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학계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분이라고 했다. 이 강의에서는 독립 이후의 지난 70년간 한일관계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독립과 정부수립 직후부터 이어진 대일청구권과 관련한 한일회담, 이후 김종필-오히라 합의로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한 분석 등 가장 기초적인 관계설정부터, 90년대에 이어진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이 보였던 전향적 태도, 그리고 최근에 아베 정부의 시대역행적인 발언과 정책들까지 한일관계의 역사를 짚어볼 수 있는 강의였다. 한일관계는 시대를 막론하고 한국의 가장 큰 외교문제 중 하나이다. 또, 2015년 이루어진 위안부 합의 등은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과 한일관계에 있어서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 상황을 보며 나는 일제강점기까지 갈 것도 없이 한일 외교관계의 역사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점도 꽤 있었다. 이후, 내가 이 분야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지 못한 것은 반성해야 할 일이지만, 이 강의는 그런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는 첫 걸음을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전부터 도쿄보다는 교토에 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든, 명분으로든 1000년간 일본의 수도였고, 1600여개의 절, 300여개의 신사를 가지고 있는, 내가 생각하는 '일본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비록 교토 방문 일정이 1박 2일로, 짧았던지라 내 기대만큼은 미치지 못했지만, 문 교수님의 특강 등, 나 혼자 여행을 왔더라면 하지 못했을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이 연수에 올 수 있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토의 마지막 일정으로 우리가 향한 곳은 관서지방의 명문 사립대 중 하나인 리츠메이칸 대학(立命館大学)이었다. 교토 인구가 150만명인데 그 중 10%가 학생이라고 한다. 그 학생들이 다니는 대학들로는 리츠메이칸 이외에도 구 제국대학 중 하나인 교토대학, 윤동주가 나온 것으로 유명한 도시샤대학(同支社大学)도 있다. 또한 리츠메이칸은 도시샤와 함께 '칸칸도리츠(関関同立)', 즉 관서 지방에서 유명한 4개 사립대학 중 한 곳으로서 대학도시로서의 교토의 이름을 유지하는 데에서 빼먹을 수 없는 대학이라고 한다. 참고로 '칸칸도리츠'를 이루는 네 학교 중 다른 두 곳은 칸사이대학(関西大学)과 칸세이가쿠인대학(関西学院大学)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굳어져 버린 'SKY' 이외에는 대학 이름을 나열하거나 소위 '급'을 지칭하는 단어들(서성한, 지거국, 등등)같은 단어가 대학 서열화 조장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없지 않은데, 일본인들은 그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 또, 한국의 경우에는 '인서울'이란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단 서울 소재 대학교를 더 높게 보고, 그 다음으로 지방(거점국립대는 그나마 버티는 것 같지만 이외는...)대학교를 쳐주는 반면, 일본은 구 제국대학이나 위와 같은 '칸칸도리츠'와 같이 지방에 있는 대학교들도 높게 쳐 주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보다 지방에 대한 대우가 낫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지역을 벗어나려는 경향이 덜한 점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며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된 한국에 비해, 지방이 좀 더 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본이 더 나은 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이때까지 우리를 인솔해 주신 요시모토 선생님 말고도 오노데라 선생님과도 합류했다. 히라이 가이치로 기념도서관에 도착하자, RIRIE라는, 일종의 국제 홍보 동아리에서 우리를 맞아주셨다. 간단한 대학 소개가 있고 나서, 우리는 조별로 동아리 구성원들과 1:5로 프리토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 이야기가 나왔었고, 한 분과 30분씩,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분은 특히 또 재일교포 분이었는데, 일본에서의 재일교포에게 이뤄지는 차별과 같은 경험도 들을 수 있어서 그 대목에서는 마음이 씁쓸해지는 면이 없지않아 있었다.
프리토크 이후 있었던 것이 국제관계학부 문경수(文京洙) 교수님의 특강이었다. 이 분도 마찬가지로 재일교포 출신으로, 일본에서의 시각으로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학계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분이라고 했다. 이 강의에서는 독립 이후의 지난 70년간 한일관계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독립과 정부수립 직후부터 이어진 대일청구권과 관련한 한일회담, 이후 김종필-오히라 합의로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한 분석 등 가장 기초적인 관계설정부터, 90년대에 이어진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 등 일본이 보였던 전향적 태도, 그리고 최근에 아베 정부의 시대역행적인 발언과 정책들까지 한일관계의 역사를 짚어볼 수 있는 강의였다. 한일관계는 시대를 막론하고 한국의 가장 큰 외교문제 중 하나이다. 또, 2015년 이루어진 위안부 합의 등은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과 한일관계에 있어서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 상황을 보며 나는 일제강점기까지 갈 것도 없이 한일 외교관계의 역사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점도 꽤 있었다. 이후, 내가 이 분야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지 못한 것은 반성해야 할 일이지만, 이 강의는 그런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는 첫 걸음을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전부터 도쿄보다는 교토에 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든, 명분으로든 1000년간 일본의 수도였고, 1600여개의 절, 300여개의 신사를 가지고 있는, 내가 생각하는 '일본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비록 교토 방문 일정이 1박 2일로, 짧았던지라 내 기대만큼은 미치지 못했지만, 문 교수님의 특강 등, 나 혼자 여행을 왔더라면 하지 못했을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이 연수에 올 수 있어서 좋았던 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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